시험 없는 초등 영어 6년, 그 다음 60점 — 한 영포자의 회상
2010년,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사교육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저는 학원도 과외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영어는 학교 수업이 전부였습니다.
초등학교 영어는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다. 6학년 때까지 단어 하나 외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상주하시던 원어민 선생님과의 회화 수행평가에서 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Hello에 Hello로 답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본 첫 영어 시험에서 60점을 받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축구만 하던 학생에게 영어 공부의 출발점은 보이지 않는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중학교 3년 내내 80점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세 가지 길이 보였습니다. 학원에 다닌다 — 집안 분위기상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영어를 포기하고 다른 과목에 집중한다 — 대학 입시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 가능성이 가장 낮아 보였지만, 결국 남은 길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어원 단어장 — 외우는 행위가 발견으로 바뀌다
처음에는 단어부터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만에 손에서 놓아버렸습니다. 단어장의 단어들이 어떤 규칙도 없이 알파벳 순서로 나열되어 있어서, 한 페이지를 외우고 나면 다음 페이지에서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외우는 것이 기억할 단서 없는 암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능률 보카 어원편을 집어 들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 영어 단어에는 어원이 앞에 붙는 단어, 가운데에 들어가는 단어, 뒤에 붙는 단어가 있고, 그 위치마다 단어의 결이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port가 옮긴다는 뜻이고, import / export / transport / portable이 모두 거기서 나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duce는 이끌다라는 뜻이라서 *introduce(안으로 이끌다 = 소개하다) / produce(앞으로 이끌다 = 생산하다) / reduce(뒤로 이끌다 = 줄이다)*가 모두 친척이었습니다. spect는 보다라는 뜻이라서 *inspect(안을 보다 = 검사하다) / respect(다시 보다 = 존중하다) / suspect(아래에서 보다 = 의심하다)*가 한 가족이었습니다.
각오 없이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몇 개를 외워야지 같은 계획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쉬는 시간과 지하철에서 훑어보다가 규칙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어원을 파면 팔수록 적게 공부하고 더 많은 단어를 외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하루 10개씩 외우게 되었습니다. 10개를 외우면 23개만 남던 기억력이, 어원 단위로 묶어 외우자 78개로 늘었습니다. 외우는 행위 자체가 암기에서 발견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강성태 영문법과 천일문 — 부품에서 문장으로
단어가 풀리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문법으로 넘어갔습니다. 강성태 영문법을 하루 3장씩 진도를 잡았는데, 한 회차에 1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외우는 방식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먼저 문법 개념을 읽고, 그다음 백지를 펴서 예제 문장의 한국어 해석만 적어 놓고, 그것을 보고 다시 영작하는 방식으로 회차를 닫았습니다. 영작이 막히면 그 자리에서 개념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다시 백지로 와서 영작했습니다. 이 방식이 문법을 안다와 문법 문장이 입에 붙는다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었습니다. 두 달쯤 지나니까 같은 구조의 문장이 머릿속에서 먼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김기훈 선생님의 쎄듀 천일문 기본편(파란색 표지)을 시작했습니다. 한 권에 1,001개의 영어 문장이 들어 있고, 각 문장에 한국어 해석과 구조 분석이 붙어 있는 책입니다. 단어와 문법으로 부품을 모아온 학생이 처음으로 완성된 문장을 다루는 단계였습니다. 강성태 영문법을 제 방식대로 끝낸 직후라서 천일문 기본편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부드러웠습니다. 진도가 쌓일수록 문장의 구조가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어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동사가 어떤 구조를 끌고 가는지, 수식 어구가 어느 명사에 붙는지 — 문장이 부품의 조립으로 읽혔습니다. 그리고 청크 단위로 직독직해가 가능해지면서 영어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천일문 기본편을 끝낸 시점이 제 영어가 한 단계 도약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영어 원서를 사전 없이 읽습니다. 어려운 단어는 표시해 두었다가 한 챕터가 끝나면 찾아봅니다. 말하기는 여전히 약한 편이고, 원어민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도 영포자라는 단어가 더 이상 저의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초등 자녀를 두신 부모님께 — 어떤 어른을 찾으시면 좋은가
16년 전의 저에게 부족했던 것은 학원도, 과외비도, 재능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이 없는 6년 동안,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원이 먼저인지, 문법이 먼저인지, 문장이 먼저인지 — 그 순서를 함께 정해주는 사람. 시험이 닥쳐서 60점이라는 충격으로 시작점을 정하지 않도록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래서 학원이든 과외든 선생님을 고르실 때 한 가지 기준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어휘를 가르칠 때 어원의 중요성을 알고, 독해를 가르칠 때 구문의 중요성을 아는 선생님인지를 보십시오. 공부를 직접 해본 사람이 학습자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 한 가지입니다. 단어를 그냥 외우게 하는 선생님과, 어원으로 묶어 외우게 하는 선생님은 같은 시간을 쓰고도 학생이 도달하는 자리가 다릅니다. 독해 지문을 해석본을 외우게 하는 선생님과, 문장의 구조를 끊어 읽게 하는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원 상담을 가시거나 과외 선생님을 만나실 때, 어휘는 어떻게 가르치십니까와 독해는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두 가지만 물어보셔도 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학원이나 과외를 따로 보내지 않으시더라도 한 가지만은 가정에서 해주시기를 권합니다. 자녀가 어원을 외울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원이 있어야 어휘가 쌓이고, 어휘가 있어야 문법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문법이 있어야 구문 학습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영어 학습은 이 네 단계 — 어원 → 어휘 → 문법 → 구문 — 의 순서를 거치는데, 가장 첫 단계인 어원을 가정에서 잡아주시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이어집니다. 거꾸로 첫 단계가 비면 학원을 보내도, 과외를 붙여도 아이가 매번 같은 자리에서 막힙니다. 시험이 없는 시기에 학원이나 과외에 의존하기보다는, 부모님께서 자녀와 함께 어원 단어장 한 권을 천천히 보시는 시간을 만들어 주세요. 그 시간이 16년 후의 자녀에게 영포자였다는 회고 대신 다른 회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시험이 없는 시기에야말로 가장 멀리 보고 시작점을 잡아 주시는 그 한 분이, 자녀의 10년 우회로를 줄여줍니다.